얼마 전에 "Save the last dance for me"를 들어서 였을까.
라는 말이 머리에 떠올라서 비공개로 적어뒀던 글을 뒤적뒤적.
6월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진희처럼 멀리서 보는 척이라도 할 수 있는 성격이었으면 차라리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6월에도 지금도, 아마도 더 시간이 지나도 그런 내가 될 순 없겠지.
삶을 불신하기 때문에 늘 불행에 대한 예상을 하고 그 긴장을 잃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겉으로는 강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몰라도 실은 나의 가장 비겁한 면이다. 어떤 일에 자기의 전부를 바친다면 그것만으로 그의 삶은 광채를 얻는다. 하지만 나는 내 전부를 바친 일, 그 끝에 잠복하고 있을지도 모를 파탄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나 자신의 삶까지도 관객처럼 거리 밖에서 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44-5쪽
나쁜 인간을 자처하기만 하면 하기 곤란한 일은 적어진다. 누군가에게, 특히 나 자신에게 야박하고 거침없어지는 일은 즐겁다. 희망과 환상을 뺏는 일은 분명 악역이지만 최소한 거짓된 일은 아니다. 거기에 악역의 즐거움이 있다.
나는 남자를 쉽게 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물론 고통스럽다. 그러나 세상에 고통은 있게 마련이고, 나에게 그 고통이 오지 말란 법은 없다. 마침 지금 고통의 시간이 왔을 뿐이다. 머리 위의 구름처럼 시간이란 머무는 것 같지만 결국은 흘러가버리는 존재이다. 이 시간은 반드시 지나갈 것이고 다시 다른 시간이 머리 위에 드리워진다. 지나간다는 것을 알면 고통을 견디기가 조금은 나아진다. 이런 것을 두고 옛사람들은 세월이 못 고칠 병은 없다고 표현한 모양이다.
옛사람들 역시 알았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말은 고통스러운 시간이나 행복한 시간 모두에게 해당된다. 행복한 시간도 흘러가버리는 한순간일 뿐이라는 사실이 고통스러운 사람에게는 행복을 놓친 데 대한 핑계가 되기도 한다.
116-7쪽
이번에도 삶은 나를 앞질러 갔다.
아무리 용의주도한 척하고, 미리 잘못될 경우를 예상함으로써 불행에 대비한다고 해도 다 소용없는 일이다. 정해진 일은 피할 수 없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자기가 갈 길을 선택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삶이 내주는 예제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뿐이다. 행동은 인간이 하지만 삶은 운명이 결정한다.
234-5쪽
"나는 희망을 갖는 일이 두려워. 결국 적응하게 되고, 지속되기를 바라고 그런 것들 모두. 희망을 가지는 것은 뭔가를 믿는다는 거야. 당신은 그 결과가 뭐라고 생각해? 삶은 늘 우리를 속인다구. 삶은 말야. 믿으라고 있는 게 아니야. 배신을 가르쳐주기 위해 있는 거야."
"의심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겠지."
"무슨 뜻인지 알아. 아주 못 믿을 건 아니지. 조금은 믿게 해줘. 말하자면 당신의 청혼 같은 그런 희망. 기쁨의 순간이 있어. 그러나 그것은 스쳐가는 일이야. 거기에 집착하면 인생이 무거워져. 빗방울처럼 발밑으로 떨어진다구."
삶은 폭력 남편과 비슷한 점이 있다. 때린 다음에 반드시 울면서 안아준다. 그리고 또 때린다. 아내들은 속는 줄 알면서도 믿는다. 절대 이혼하지 못한다. 사실은 이혼할 필요도 없다. 그런 과정 자체가 결혼이니까. 삶은 커다란 속임 속의 작은 믿음을 익혀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259-60쪽
사랑을 얻기 위해 한숨짓고, 얻은 다음에는 믿지 못해 조바심을 내고, 결국에는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스스로 피폐해지는 과민한 사랑. 어쩌면 그것은 나의 기질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의존적이고 어리석은 방식으로 타인에게 사랑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한 사람에게는 그런 사랑을 원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
나는 사랑의 소모를 두려워했다. 마치 광합성으로 스스로 제 먹이를 만드는 녹색 식물처럼, 햇빛을 받아들이고 물을 길어올려 자기 안에서 스스로 먹이를 만드는 사랑을 원했다. 내 몸속에서 혼자 사랑이라는 먹이를 만들고 그것을 먹으며 생존해가기를 말이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황량한 겨울 들판을 헤매며 타인을 찾아 울부짖고 싶지는 않았다.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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