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쿠니 가오리 씨가 쓴 책을 많이 읽긴 했지만 그건 '좋아'서가 아니라 일종의 관성이었다. 어느 정도는 안심하고 있을 수 있는 작가라고 할까.
그런 에쿠니 가오리 씨의 작품 중에서 처음으로 마음에 쏙 든 작품은 이 『하느님의 보트』다. 『냉정과 열정 사이』도 좋아하지만 『냉정과 열정 사이』의 10년의 약속을 동경하는 것과 달리 『하느님의 보트』는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도 의심하지 않는 사랑을 만날 수 있을거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의심하고 있지만 다시 예전처럼 믿고 싶다. 의심하고 외면하는 쪽이 상처받지 않는다고 해도 그 길은 내겐 너무 비겁하게 느껴지는걸.
내 손을 쥐어서 자신의 다리 위에 얹어줄 사람을 만나고 싶다. :)
상자 안에 들어갔다는 말은 엄마와 나만이 통하는 표현으로,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즐겁고 기분 좋은 일도 지나가 버리면 돌아오지 않는다.
- 하지만 그건 슬픈 일은 아냐.
엄마는 화려한 꽃무늬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 지나간 일은 절대로 바뀌지 않거든. 항상 그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거야. 지나간 일만이 확실한 우리 것이라고 생각해.
4년 전, 처음으로 친구가 생긴 마을에서 또다시 이사를 하는 것이 싫어 울면서 불평을 늘어놓았을 때의 일이다.
- 지나간 일은 모두 상자 안에 넣어 두면 되니까 절대로 사라질 염려가 없어. 얼마나 멋지니?
나는 가끔 그 상자를 상상한다. 어떤 모양으로 생긴, 어느 정도나 큰 상자일까? 뚜껑은 어떻게 생겼을까? 무슨 색깔일까? 아마 그 상자는 화려한 꽃무늬가 있을 것이다. 엄마의 스커트처럼.
(1997 다카하기, 18-19쪽)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도서관을 이용해 본 적이 없었지만 한번 이용해 보고 나서 꽤 좋은 시스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짐이 늘지 않는다.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다. 나는 원래 짐이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그런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물건은 소유하는 것보다 버리는 쪽이 훨씬 편하다.
- 그건 생활에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는 뜻 아닐까?
모모이 선생은 그런 식으로 나를 꾸짖었다.
- 언제까지나 자유롭고 싶다는 뜻 아냐?
사실,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것 때문에 사람은 한곳에 조금씩 얽매이게 된다.
(일요일, 49쪽)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모모이 선생과의 결혼도, 그 사람과의 사랑도.
후회한 적은 없지만 가끔씩, 정말 가끔씩, 문득 두려움이 느껴진다.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기 때문에.
(모모이 선생, 62쪽)
사실 그 사람은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었다. 우리는 부도덕한 사람들이야. 파멸적이지. 바보, 그걸 몰랐어? 연애는 부도덕한 인간의 특권이야.
(모모이 선생, 71쪽)
나는 혼자 걷는 것을 좋아한다. 혼자 있을 때에는 보폭을 크게 해서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힘차게. 오직 앞을 향하여. 가끔 기묘한 감각에 얽매이기도 한다. 흔치 않은 일이지만 그 감각에 사로잡히고 싶어 산책을 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걷고 있으면 저쪽에서 갑자기 그 사람이 걸어오는 그런 감각.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각이지 상상이나 기대감은 아니다. 그 사람이 정면에서 곧장. 갑자기.
나는 역시, 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째서, 설마, 이럴 수가, 따위가 아닌 역시, 라고. 그 사람은 웃고 있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쪽에서 걸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우바가 연못, 117쪽)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배웅하면서 나는 가벼운 상실감에 휩싸인다. 내 인생에서 이미 영원히 잃어버린 것. 손을 놓아 버린 것.
부도덕.
나는 그 말을 떠올렸다. 연애는 부도덕한 인간의 특권이라고 그 사람은 말했다.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도덕한 인간은 절대로 갈 수 없는 곳도 있다. 내가 아무리 태평스런 성격이라고 해도 그건 알고 있다. 아니, 단 한순간도 잊어 본 적이 없다.
(우바가 연못, 119쪽)
한번 만나면, 사람은 사람을 잃지 않는다.
예를 들면, 그 사람과 함께 있을 수는 없더라도 그 사람이 이곳에 있다면, 하는 상상은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이곳에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 그 사람이 이곳에 있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그것만으로 나는 많은 위안을 얻었다. 그것만으로 나는 용기를 내어 혼자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가을바람,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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